Home > 자료실
 
사회변화를 모색하는 자유주의 지식인의 전략  
  이름 : 시장경제제도연구소 날짜 : 2013-03-20 오후 1:26:42 조회 : 1315  
파일 : 사회변화를 모색하는 자유주의 지식인의 전략.hwp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요즘

<사회변화를 모색하는 자유주의 지식인의 전략>
(Rothbard의 4가지 전략유형을 중심으로)



요 약

자유주의 운동은 맑시즘이나 사회주의 운동, 혹은 그 변형에 비해 이를 사회변혁 운동으로 삼을 때 나름대로 어려운 점들을 안고 있다. 우선 자유주의자들은 이들에 비해 전략에 대해 별로 투자를 하지 않고 있다. 이에 더해 자유주의는 마르크스주의의 노동자, 혹은 모택동의 농민 등과 같이 즉각적으로 확인 가능한 특별히 선호하는 사회변혁의 주도층을 가지고 있지 않다. 자유주의의 주장이 일반인이 보기에는 반직관적인 경우도 있다.

이런 문제들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자유주의 지식인, 특히 하이에크 소사이어티는 어떻게 대응해나가야 하는가? 여기에서는 로스바드가 제기한 4가지 유형, 즉, 노장자의 은거주의, 보에티의 대중 불복종운동, 페넬론과 튀르고의 “왕의 개종” 전략, 제임스 밀의 “레닌주의”를 살펴보았다.

자유주의 학자들은 “진리는 스스로를 밝힌다.”는 신념 아래 전략의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해보지 않는 경향이 있으나 이는 지양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튀르고의 개혁이 성공하지 못한 결과, 많은 사람들이 종전보다 훨씬 더 비참해졌듯이, 올바른 방향의 개혁도 전략이 잘못되면 오히려 많은 사람들에게 더 큰 고통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유주의자들은 먼저 이론의 측면에서 핵심적 개념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 밀의 경우에서 보는 것처럼 잘못된 이론에 기초한 전략은 그 전략이 아무리 우수해도 사람들에게 불행을 가져온다. 대표적인 것이 마르크스주의와 사회주의였다.

아울러 자유주의자들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불식시켜야한다. 기득권 옹호자; 부패의 옹호자; 사회의 변화를 거부하는 자라는 식의 자유주의자에 대한 잘못된 도식을 뿌리 뽑을 필요가 있다. 이런 인식의 오류를 지적하는 것 이외에도 자유주의가 “최첨단” 이념이란 인식을 심어주는 것도 잘못된 인식을 제거하는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이런 전략을 만들어내기 위해 어떤 의미에서는 반자유주의적인 싸와야할 “지배적 도그마”가 무엇인지 집어내고 어떤 순서로 바로잡을 것인지에 대해 고민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 외에도 사회변혁을 위해 어떻게 하면 영향력을 증대시켜 대중들을 설득해낼 수 있는지, 그리고 핵심적이고 정력적인 회원들을 확보할 수 있는지, 또 이들이 학계 및 언론계 등에서 핵심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할 것인지, 아울러 현실의 정책을 만들고 실천하는 일에 직접 참여하는 집단들과는 어떤 관계를 맺고 중요한 개념과 주장을 어떻게 알릴 것인지 등도 중요한 고려사항이다.

이 글은 전략에 대해 많은 고민과 연구를 하고 쓴 글이 아니다. 순전히 자유주의자들의 전략에 대한 로스바드의 글이 중요하다고 판단하여 이를 소개하고, 전략의 문제에 대해 좀더 체계적으로 고민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환기시키고 자유주의 정치학자, 지식사회학자와 같은 이 분야 전문가들의 논의를 촉발하려는 목적으로 쓴 것이다.







1. 문제의 제기

이 글은 자유주의자가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사회변화를 어떻게 이루어낼 수 있으며, 이런 변화를 이루어내는 데 지식인의 역할은 무엇인지에 대해 로스바드(Murry N. Rothbard)의 글, “Concept of the Role of Intellectuals in Social Change Toward Laissez Faire" (The Journal of Libertarian Studies, Vo. IX No. 2, Fall, 1990, pp. 43-67)를 소개하고 이 글을 지렛대로 삼아, 한국 자유주의자들의 사회변화에 대한 역할, 특히 한국하이에크 소사이어티의 역할과 전략에 대한 논의를 점화하기 위해 쓰였다.

“진리는 스스로를 밝힌다.”고 한다. 이러한 믿음은 사실 상당한 근거를 가지고 있고, 자유로운 시장과정에 대한 믿음도 생산자들의 경쟁과정이 방해를 받지 않는다면 소비자들이 무엇을 어떤 방식으로 원하는지에 대한 생산자들의 다양한 가설들이 테스트됨으로써 궁극적으로 “올바른” 가설이 선택되는 경향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에 기초해 있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아울러 던질 수 있다. “그렇다면 진리가 아니었던 맑시즘이 그토록 오랫동안 지식인의 지지를 받으며 인기를 누렸고, 아직도 정부간섭주의, 신중상주의 등의 이론은 왜 그렇게도 질긴 생명력을 지니고 있는가?” 아마도 사회에 대한 이론의 경연장은 실험의 과정이 길고 복잡하고 불분명하며, 이론의 진위보다는 자신의 기득권 보호와 이득의 획득에 더 관심을 가진 이들이 존재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렇다면 이런 문제는 어떻게 극복될 수 있는가?

로스바드가 “교육주의”(educationism)이라고 명명한 단순한 생각을 우리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로스바드는 많은 자유주의자들이 열심히 자유시장에 대한 개념을 가르치면, 세상이 변화할 것이라는 “순진한”(naive) 교육주의를 가지고 있으며, “국가 권력의 문제”를 어떻게 직면할 것인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지 않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런 전략의 문제를 함으로써 사회변혁에서 자유주의자들이 지녀야 할 영향력이 반감되고 있지는 않은가? 그는 좌파는 이론을 다듬는데 10퍼센트를 투자하지만 전략을 가다듬는 데에는 90 퍼센트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면서, 자유주의자들이 사회변화의 전략에도 각별히 유의할 필요가 있음을 역설하고 있는데 이런 문제의식은 현재 한국의 자유주의자에게도 유효하다고 생각된다.

이에 이 글에서는 로스바드의 논문에서 제시한 자유주의자들이 시도했던 4가지 유형에 대해 비교적 자세하게 소개하고, 한국 하이에크 소사이어티의 자유주의자들이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를 가지고자 한다. 이 글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2장에서는 순진한 교육주의와 4가지 유형에 대해 논의하고자 한다. 그런 다음 3장에서는 각 유형에 대한 로스바드의 논의를 소개한다. 4장에서는 한국의 자유주의 지식인, 특히 하이에크 소사이어티의 사회변화에서의 역할에 대한 시사점을 간략히 정리할 것이다.




2. 순진한 교육주의와 4가지 유형의 전략

가. 순진한 교육주의

새로운 “근본적, 급진적” 아이디어들은 극소수의 개인들로부터 시작된다. 대부분의 자유주의자들은 로스바드가 순진한 교육주의(naive educationism)라고 부르는 전략을 부지불식간에 채택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진리를 알게 되었는데, 대중들은 잘 모른다고 생각하고 자유주의 지식인들은 사회변화를 이루기 위해서 강의, 토론, 책, 팜플렛, 신문 등 여러 가능한 수단을 동원하여 이들 무지한 개인들을 계몽하여 정확한 자유주의의 견해를 가진 사람으로 개종시켜야 한다고 믿는다.

이런 암묵적 견해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지니고 있다. 이런 점에서 미제스도 예외는 아니었다.(미제스는 그의 대작 '인간행동'(Human Action)에서 ‘진리는 스스로를 밝힌다.’는 스피노자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로스바드가 현실변화에 대한 전략을 연구하라고 주문하고 있으나, 사실, 미제스는 이런 교육주의에 몰두하고 난 후 다음과 같이 후회한 바 있다. “나는 나의 노력을 이미 수없이 잘못이 밝혀진 오류들을 또 한번 밝히는 데 쓴 것을 후회할 때가 있다. 나는 사이비 경제학과의 투쟁에 나의 한정된 능력을 너무 소모하였다.”('회고록'(Notes and Recollections), p. 109).

이 교육주의의 중요성에 대해 로스바드도 일정부분 동의하고 있다. 다만 그는 이 교육주의가 국가권력의 문제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 문제는 그 자체로 어쩌면 정치학의 중요한 주제일 수 있고, 정치학자, 혹은 사회학자들이 그 대답을 제시해야할 문제이기도 하지만, 로스바드는 정치학의 이론을 제시하는 대신, 자유주의자들 가운데 현실의 변화를 시도했던 이들의 전략과 좌절을 설명하고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짐으로써 그의 논의를 전개하였다.

사실, 로스바드가 순진한 교육주의라고 이름붙인 것도 제대로 하기가 쉽지 않은 형편이다. 지금 학계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니고 있는 학자들이 자유주의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동시에 이에 대한 강한 소신을 가지고 있는지 확신을 가지기 어려울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이들이 로스바드가 교육주의라고 명명한 것을 시도하고 있는지는 더욱더 의심스럽다. 케네, 튀르고, 밀 등의 예에서 보듯이, 그 전략이 어떤 것이었든, 가장 영향력이 있는 학자들이 자유주의를 위해 노력하고 힘을 합했을 때 비로소 사회변혁의 조짐을 기대할 수 있었다.




나. 4가지 유형의 전략

(1) 은거주의(retreatism)

로스바드가 제시한 자유주의(Laissez-faire) 지식인들이 취하였던 4가지 유형은 다음과 같다. 은거주의(retreatism), 시민 불복종운동, 왕의 개종, 제임스 밀의 레닌주의.

그는 노장자의 사상이 인류 최초의 자유주의라는 점을 높이 사고 있다.2 로스바드는 노자의 무위(無爲)사상이 정부가 무위(無爲)할수록 백성이 편하다는 최소정부론이며, 자생적 질서를 이해한 것으로 보았다. 아울러 그는 장자를 최초의 개인주의적 무정부주의자(individualist anarchist)로 보고 그가 노자의 자생적 질서의 이론을 더 발전시켰으며, 최초로 국가를 “규모가 커진 도적떼”로 보았다는 점에서 특별하다고 말하고 있다.3

이처럼 그는 노장사상 그 자체는 높게 평가하지만, 현실세계로부터의 도피라는 은거주의의 전략은 사회변화의 전략이 되기는 어렵다고 보고, 다만 노장사상의 은거주의는 당시 상황으로서는 다른 방법을 찾지 못해서 나온 “절망적” 수단이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현재의 노장사상이 여전히 현실도피의 성격을 가지면서 개인적 내부성찰의 함양 부분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노장사상의 “과격성”에 비추어 정당화되기 어렵다고 보고 있다.

사실, 노장자의 사상은 한국에서의 자유주의를 위해서도 일정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판단된다. 우선, 노자, 장자가 국가간섭에 대비된 개인의 자유, 자생적 질서, 작은 정부를 주장하였다는 점에서 이런 개념들이 단순히 서구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예시로서 교육에 활용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4 현재 한국에서도 일견 노․장자 사상이 무속사상, 불교사상 등과 합쳐져 탈속주의의 성격을 짙게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로스바드 식으로 노자와 장자를 이해하고 이를 현대적으로 계승하고자 하는 분들이 있는지 알 수 없다.

아울러 한국의 자유주의 학자들 가운데 일부도 혹시 탈속주의 성향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경제학자가 가치중립성을 지키면서 연구하여야 함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학의 연구가 세상을 그 사람이 보기에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의식이 없이는 경제학 더 나아가 사회과학에 대한 열정이 지속되기 어렵다. 이런 점에서 어쩌면, 있을 수도 있는 탈속주의 성향과 경제학에 대한 열정은 양립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전략으로서의 은거주의에 대한 논의는 이 정도로 그치고자 하며 나머지 3가지 전략에 대해 개관하고 각 전략의 구체적 내용에 대해서는 다음의 장에서 다루기로 한다.




(2) 대중불복종 운동

은거주의 이외에 로스바드가 논의하고 있는 남은 세 가지 전략은 시민 불복종운동, 왕의 개종, 제임스 밀의 레닌주의이다. 우선 이 가운데 가장 대비되는 시민 불복종운동과 왕의 개종을 다음 장에서 자세히 검토하기 전에 그 관계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자.

대중 불복종(Mass Disobedience) 운동의 이론적 기초는 대략 다음과 같다. 국가, 특히 국왕이 국민들에 대해 권력을 휘두르고 자의적 간섭을 하는 것은 국민(시민)이 동의하였기 때문이며 이런 자의적 권력을 종식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물리적으로 국왕에 맞설 필요도 없으며 단지 동의의 철회만이 필요하다. 지식인들은 이런 시민 불복종 운동의 지도자가 되기만 하면 된다.

어떻게 시민이 국가의 권력에 복종하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검토해 보기로 하고, 여기에서는 시민 불복종 운동에 개재된 어려움에 대해 검토해본다. 그 어려움이란 다름 아니라 어떻게 복종하게 된 시민을 다시 설득시켜 불복종으로 이끌 것인가라는 점이다. 특히 국가의 권력이 복종을 얻어내는 방법의 하나가 조세를 거둔 돈으로 각종 혜택을 부여함으로써 국민의 동의를 “사는” 것일 때, 이미 이런 혜택을 국가의 ‘선처’에 따라 얻는 데 익숙해진 사람들은 비록 그 돈이 직간접적으로 자신들의 호주머니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누군가가 주는 것으로 생각하거나 아니면 부자가 내어주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을 때, 이런 운동으로 이끄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어렵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실질적으로 가능하고 효과적인 것은 불온해 보이는 “선동”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앞으로 살펴보게 될 라 보에티(La Boetie)는 선동적 요소가 매우 강한 글을 쓴 대표적 인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3) 왕의 개종 전략

이에 비해 왕을 개종시키는(Converting King) 방법은 설득을 해야 할 대상이 집권하고 있는 왕과 그 주변인물들이라는 점에서 그 수가 매우 적다는 장점을 지니며 동시에 권력과 충돌하는 문제를 우회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 범주에는 왕, 혹은 그의 후계자를 자유주의 철학자-왕(philosopher-king)으로 변화시키려는 전략과 함께, 왕의 신임을 받아서 자유주의 정책을 펼치는 “왕의 대리인-장관”이 되겠다는 전략을 포함한다. 실제로 튀르고(Turgot)가 그런 전략을 취한 바 있다.

그러나 이 전략은 왕의 변심, 사망, 혹은 불리한 정치적 여건에 직면하면 금방 사상누각처럼 사라질 가능성이 있을 뿐 아니라, 이 전략을 추구하던 사람 자신이 반자유주의자가 될 가능성마저 가지고 있다.5

비록 단순한 교육주의에 비해서는 나름대로 전략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으나, 시민불복종운동이나 왕의 개종 전략도 모두 근본적으로는 교육주의의 변형으로 볼 수 있다. 시민 불복종운동은 대중을 상대로 한 교육주의의 변형으로 볼 수 있는 반면, 왕의 개종 전략은 왕이나 권력자를 상대로 한 교육주의의 변형으로 볼 수 있다. 다만, 이 두 가지 전략은 단순히 진리는 스스로를 밝힐 것을 믿고 묵묵히 그 원리를 설명하는 데 머물지 않고 실천적으로 구체적 대상을 두고 사회변화를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단순한 교육주의와 다른 것은 분명하다.




(4) 제임스 밀의 레닌주의

'경제학의 본질과 중요성'(Nature and Significance of Economic Science(2nd ed. London: MacMillan & Co. 1938)이란 경제학설사에 남을 명저를 저술하였으며,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의 아버지이기도 한, 제임스 밀(James Mill)의 경우는 매우 특이하다. 정치적 민주주의를 성취하면, 자유시장이 뒤따를 것으로 잘못 판단한 그는 정치적 민주주의를 위해 철학적 급진파(Philosophic Radical)들을 이끌면서, 한 편으로는 영향력이 컸던 제레미 벤담과 리카도를 전면에 내세우고 핵심적인 학자들을 이끄는 한편, 언론 등에 심지어 헛소문을 퍼뜨리며 자신이 생각한 자유주의(더 정확하게는 정치적 자유주의, 민주주의)를 실현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리카도를 국회로 보낸 것도 밀의 설득에 따른 것이었다고 하며, 아들 존 스튜어트 밀을 혹독하게 교육시킨 것도 자신을 물려받아 이 운동을 지속하도록 지도자로 키우기 위해서였다고 하니 놀라울 뿐이다.

여기에서 밀의 전략은 전방위적이라고 할 수 있다. 소규모 핵심적인 집단을 조직하여, 회원을 의회로 진출시키는 한편, 학계의 주도적 위치를 차지하도록 하고, 언론과도 연계를 해나갔다. 한 사람이 아니라 생각을 공유하는 집단을 만들고 이들이 사회변혁을 시도할 수 있는 핵심적 지위로 나아가도록 하는 동시에 법안들을 만들어 이를 통과시키기 위해 언론을 동원하였다. 밀은 학자답게 이런 헛소문을 퍼트리는 것을 정당화하는 이론을 펼치기도 하였다. 로스바드는 이런 밀의 전략을 “레닌주의”라고 이름붙이고 있다.

앞으로 더 자세히 보게 되겠지만, 철학적 급진파들은 정확하지 못한 이론으로 인해 철학적 급진파들이 반곡물법동맹(Anti-Corn Law League)와 연대하여 곡물법 폐지에 전념하기보다는 투표권의 확대에 전력을 기울임에 따라 중요한 정치세력이 되지 못하고 곧 쇠퇴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들은 핵심적 교육대상을 일반대중이 아니라 영향력과 잠재력이 큰 뛰어난 인물들로 삼았으며, 회원들과 이렇게 교육을 시킨 이들이 사회 각 분야에서 핵심적 지위를 차지하도록 적극 지원하고 또 이들과 연대함으로써 사회변화를 이루어내려고 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실제로 이런 전략은 주효하여 이들은 투표권의 확대를 통해 보통선거권을 확립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철학적 급진파들, 그 중에서도 특히 제임스 밀은 “목적을 위해 수단을 정당화하는” 등 자유주의자가 보기에 일정한 정도 의구심이 드는 부분을 지니고 있으나 우리는 철학적 급진파에 대해 이념적으로 정예화한 학자들과 사회개혁가들이 사회변혁을 위해 전략의 부분에 이르기까지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며 온 힘을 바쳤다고 평가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이들은 비록 소수이지만 정책정당의 정책연구소의 이념적으로 선명한 열성적인 핵심 브레인들의 모임 같은 성격을 띠었다. 이들에게 권력은 획득 그 자체가 중요했던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생각하는 기존의 사회를 더 바람직한 모습으로 변혁시키기 위해 필요한 수단으로서 중요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제임스 밀의 “레닌주의”는 제임스 밀과 같은 정력적이고도 치밀하고 심지어 “교활하기까지 한” 배후의 인물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실제로 시도되기 어려운 측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진리는 스스로를 밝힌다.”며 위안하는데 그치기를 거부하는 실천적 자유주의자들에게는 좋은 연구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전략 속에는 앞에서 언급했던 교육대상의 측면에서 본 교육주의와는 구별되는 또 다른 측면의 교육주의가 숨어있다. 즉, 핵심적 브레인들 간의 치열한 논의와 이념적 공통분모의 확보 과정이 그것이다.

이 운동이 일정한 세력을 얻게 된 데에는 당시 매우 영향력이 컸던 벤담이, 비록 제임스 밀처럼 배후조정자는 아니었지만, 여기에 대표적 인물로 이 운동에 참여하고 있었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비록 왕은 아니지만 사회적 영향력이 매우 큰 사람이 그 운동에 힘을 실어주었다는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일정 정도까지 왕을 개종시키기라는 전략도 숨어있음을 알 수 있다.

다음 절에서는 로스바드가 분류한 4가지 유형 가운데 은거주의를 제외한 나머지 전략에 대해 좀 더 충실하게 다루고자 한다.







3. 각 유형의 전략의 대표적 전개의 사례

(1) 시민불복종운동의 지도자로서의 지식인

가. 보에티(Boetie)의 사례

보에티(Etienne de La Boetie, 1530-1563)는 시민불복종운동의 개념을 처음으로 제시한 인물이다. 그의 '자발적 복종'(The Politics of Obedience: The Discourse of Voluntary Servitude, New York, Free Life Editions, 1975)은 보에티가 오를레앙 법대에 다니던 학생 때 쓴 글로 바로 이 시민 불복종을 주장한 매우 “불온한” 내용을 지니고 있었다. 대학생 시절에 이 글을 썼으나 후일 그는 보르도 의회의 유명한 판사를 지냈고, 종교적 이단인 위그노를 탄압해야한다고 주장하는 등 자신의 글과 전혀 다른 삶을 살았다.

보에티는 로크와 홉스에 1세기 앞서 모든 개인의 자유에 대한 자연권을 주장하였으며 이를 주장하는데 논리적 추론의 원칙을 사용하였다. 그는 폭정의 의미를 “한 사람의 잘못된 통치”라는 고전적이고 중세적인 애매한 개념에서 벗어나 “개인의 자연권을 어기는 모든 국가의 행동”으로 그 개념을 확장하는 동시에 폭정을 행하는 주체도 왕으로부터 독재자에 봉사하고 국가통치의 특권을 공유하는 국가의 도구까지로 확장하였다. 아울러 그는 흄에 200년 앞서 모든 폭정은 장기적으로는 국민 대다수의 동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보았다.

그는 독재의 바탕은 대중의 동의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이런 동의가 열성적일 필요는 없으며, 습관적 복종 혹은 무관심으로도 충분하다고 보았다.6 국가가 일반대중의 동의를 얻기 위해 동원하는 방법으로는 첫째, 오랜 역사를 지닌 “서커스 보여주기,” 둘째, 독재자의 지배가 현명하며 모두에게 혜택을 주는 것이라는 “가짜 이데올로기 심어주기,”7 셋째, 조세를 거두어 그 일부로 복지혜택을 주어 “동의를 구매하기,” 넷째, 귀족이나 현대판 귀족인 관료들에게 특권을 주어 이들의 “동의를 특별 구매하기” 등이다. 보에티는 특히 일반대중과 관료들에 대한 “뇌물”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독재자들은 서커스 이외에도 물질적 혜택을 주어 이것이 독재의 혜택으로 여기게 만든다. 보에티에 의하면, “바보들은 (왕과 지배계급들이) 그들 자신의 자산의 일부를 다시 되돌려 받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모른다. 그들로부터 먼저 수탈하여 받아가지 않고서는 그들의 지배자들이 그들이 받는 것을 줄 수 없다. 군중들은 이런 식으로 뇌물에 열성적으로 쉽게 걸려든다.”

그는 안정적인 지배구조를 지닌 “충성스런” 귀족, 관료 등의 계급들에게 영구적이고 지속적인 특별 구매를 함으로써 이들의 지지를 얻는 것이 독재자의 지배의 발판이자 비밀이라고 보았다. 이제 사회의 상당히 큰 부분이 어쩌다 국가가 주는 선물이 아니라 규칙적이고 영구적이며 상당히 큰 독재의 수익의 일부를 얻게 된다. 따라서 이들은 선전이나 습관에 의해 속아서가 아니라 독재 아래에서 누릴만한 정도로 상당히 큰 몫을 얻는다는 것을 인식하며 자발적으로 거대 독재자 아래에서 노획물을 나누는 참여하는 추장이 된다.

이런 식으로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독재에 동의를 하고 있을 때, 보에티는 독재를 종식하기 위해서는 대중이 독재자와 직접 물리적 충돌을 할 필요도 없으며, 단순한 그런 동의의 철회, 불복종으로 충분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로스바드는 이 전략에 의문을 가진다. “비록 일반 대중의 동의의 철회”가 그 핵심이라고 하더라도 어떻게 습관, 선전, 특권 등에 의해 눈이 멀게 된 일반 대중이 대중 불복종 운동에 나서게 될 수 있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보에티가 준비하고 있는 대답은 다음과 같다.

첫째, 엘리트의 존재이다. 모든 대중이 습관적 복종을 하는 것은 아니며 일부 눈을 뜬 엘리트들이 있다는 것이다. 둘째, 이 용감한 엘리트들의 교육과 선동에 의해 일반 대중이 자유의 축복을 이해하게 되고 국가에 의해 심어진 환상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셋째, 지배계급 가운데에도 일부 불만세력들이 있으므로 지배계급을 분리함으로써 대중 불복종 운동에 참여하도록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로스바드는 실제 역사에서 대중 불복종운동이 성공한 사례는 인도의 간디 정도인데 이 경우에도 분파주의적 성격의 운동이었음을 강조하고 영웅적 소수가 실제로 대중을 설득해낼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의구심을 보이고 있다.

다른 한편, 우리의 관심을 끄는 대목은 보에티의 논리전개 방식과 그 영향이다. 그는 자신의 논리전개를 구체적 역사에 적용하지 않았기에 당대에 미친 영향은 약했던 반면 오랜 기간 동안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자신의 추상적 논리전개 방식은 자신이 쉽게 자신의 근본주의를 버릴 수 있게 해준 반면, 후세대에게는 엄청난 영향을 미친 것이다.

16세기 급진적 위그노(radical Huguenot)에 의해 그의 저술은 “조심스럽게”8 이용되었다. 보에티의 '자발적 복종'가 첫 출판된 것은 1574년 그 자신 혹은 그의 상속자에 의해서가 아니라 급진적 위그노에 의해서였다. 2년 뒤 제네바의 캘빈주의 목사 시몬 꿀라르(Simon Coulart)가 취합한 급진적 위그노의 논문집에 보에티의 이름을 달고 발간되었다. 아무튼 이들은 1575년 그의 대중불복종 운동을 받아들여 도시와 지방의 조세납부거부운동의 연합을 주장하기에 이른다.

그 후 보에티의 글은 17세기에는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으며, 18세기에 몽테뉴의 수상록에 부록으로 실렸다. 19세기 프랑스혁명기에는 라메네(Abbe de Lamennais)가 자신의 과격한 서문을 보태어 이를 발간하였고 나폴레옹 3세의 쿠데타를 반격하기 위한 목적으로 1852년에도 발간되는 등 두 번이나 다시 발간되었다.

19세기에 와서는 톨스토이(Leo Tolstoy)의 비폭력 무정부주의운동에 영감을 주었다고 한다. 톨스토이는 보에티의 글을 아주 길게 인용하고 자신의 주장의 발전의 원천으로 삼았다. 아울러 힌두에 보낸 톨스토이의 편지가 간디의 생각을 형성하는 핵심적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20세기 초 독일의 대표적 무정부주의자 란다우어(Gustav Landauer)는 보티에의 주장을 그의 '혁명'(Die Revolution, 1919)의 중심 논제로 삼고 있다. 그 외 20세기 네덜란드 평화주의-무정부주의자인 리트(Bartelemy de Ligt)도 '폭력의 정복'(Conquest of Violence)에 보에티의 '자발적 복종'을 논하였고 1933년 이를 네덜란드어로 번역하였다. 이처럼 비록 당대에는 영향을 별로 미치지 못했지만, 흥미롭게도, 로스바드의 표현을 빌리면, 오랜 시간을 두고 계속 “오를레앙의 법학과 학생의 사변적 원칙이 사후에 보르도의 존경받는 저명한 관료에 대해 복수를 하고 있다.”




나. 시사점

보에티의 사례가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은 무엇일까? 우선, 로스바드는 우선 전략적으로 보에티가 영웅적인 지도자에 너무 의존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음에 대해 아쉬워하고 있다. 아울러 그는 보에티의 저술이 추상성을 지니고 있었기에, 비록 미래에 지속적 영향을 주었지만, 당대에 영향을 미치기에는 구체적 메시지가 부족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 점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비교적 분명해 보인다. 우선 연구에서 두 가지 방향을 동시에 진행할 필요성이다. 장기적이고도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는 추상적이며 논리적으로 잘 정립된 이론을 명쾌하고도 쉬운 언어로 써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 점은 보에티의 저술이 심지어 인도의 간디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보면 명확해진다.9 이와 동시에 이 추상적 원리를 현재 가장 뜨거운 이슈가 되고 있는 구체적 문제에 적용하여 상당히 “도발적으로”10 제시하는 작업을 해나가야 한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수도이전 반대운동, 사학법 개정 반대운동, 재산세 납부 거부 움직임 등 일부 대중 불복종운동적인 모습을 띠는 것들이 보이고 있는데, 다만 여기에서 보에티의 사례나 인도의 불복종운동에서 시사하는 바는 이 운동이 전반적 대중 운동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분파적 성격을 띠거나 그렇게 보이지 않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아울러 이런 운동이 자유주의와 어떻게 연계되는지에 대한 확실한 천명을 하지 않을 경우에는 이것이 자칫 일부의 이익을 위한 운동으로 폄하되거나 대중들이 그렇게 인식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2) 왕의 개종자이자 위로부터의 혁명자로서의 지식인

가. 역사적 및 이론적 배경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대중 불복종운동과 여러 가지 점에서 대조를 이루는 것이 왕을 개종시키려는 전략이다. 이 전략은 대중을 제대로 설득해내기는 매우 어렵기 때문에 왕을 자유주의-철인왕(philosopher-king)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한결 더 현실적인 방법이라는 생각을 바탕에 깔고 있다.

이들이 볼 때에는 은거주의나 대중불복종 운동은 자유주의 사회변혁을 위한 실질적 전략이 되기 어렵다. 이런 전략이 성장한 배경은 절대왕정의 성립과 궤를 같이 한다. 절대왕정의 확립은 루이 14세 때 절정을 이루는데, 1680년대에 절대왕정과 중상주의에 대한 반발이 자라났으며 이런 반발과 함께 정치적 체제에 극적 변화를 추구하지 않으면서 자유주의적인 사회변혁을 이루고자 하는 새로운 전략이 등장하였다.

왕의 개종 전략을 추진한 이들은 나름대로 이론적 배경을 가지고 왕을 설득하고자 하였다. 즉, 자유주의적 재산권의 보장이 국부를 증가시켜 국가 전체에 좋으며, 모든 이의 행복을 증진시키므로, 국부의 일부를 가져가는 왕이 반대할 이유가 별로 없다는 것이다.




나. 주요 인물들

이런 전략을 추진한 대표적 인물로 페넬론(Fenelon) 추기경(1651-1715)과 부르군디 서클(Burgundy Circle), 그리고 케네를 중심으로 한 중농주의자들과 튀르고를 들 수 있다.




<펠넬론 추기경과 부르군디 서클>

페넬론 추기경은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루이 14세의 비(妃) 망트농(Marquise de Maintenon, 1635-1719)의 종교적 고백을 듣는 자리를 얻는다. 그리고서 왕위를 이을 것으로 예상되는 루이 14세의 손자 부르군디 백작의 교사가 되어 루이 14세의 절대주의와 중상주의와는 달리 미래의 왕을 자유주의자로 만들기 위해 주변에 부르군디 서클을 형성시킨다. 특히 그는 지속되는 전쟁과 고율의 세금, 그리고 무역의 파괴에 대해 크게 분개하고 있었으며11 부르군디 백작의 교육을 위해, 왕자 텔레마끄에게 현자가 설명하는 방식으로 된 정치 소설, '텔레마크의 모험'(Adventures de Telemaque)를 써서 가르친다.12 13

그러나 미래의 자유주의 왕으로 키운, 첫 번째 왕위 상속권을 지녔던 부르군디 백작이 1711년에 죽자 모든 꿈이 물거품이 된다.14 로스바드가 지적하는 것처럼, 왕을 개종시키려는 노력 자체는 눈물겨울 정도로 주도면밀했지만, 그 왕이 언제나 변심할 수 있다는 점을 차지하고라도 그 사람의 운명이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너무 많은 것이 걸려있게 되는 문제가 발생하였다.




<케네와 중농주의자들>

페넬론의 시도가 있는지 약 50년 후, 케네(Francois Quesnay: 1694-1774)가 왕을 개종하고자 하는 시도를 한다. 케네는 의약과 자연과학 분야의 저명인사였으며 1750년에 루이 15세의 비(妃) 퐁파두르(the Madame de Pompadour)의 개인 주치의가 되고 곧 왕의 주치의가 된다. 1750년 60대 중반에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해서 케네는 중농학파운동을 조직한다. 여기에 젊은 미라보(Mirabeau, 1715-1789)가 가담하여 적극 활동을 펼치면서 저널을 발간하고, 화요일 저녁 정기 세미나를 미라보의 집에서 가지는 등, 중농학파는 곧 대표적인 영향력 있는 학파가 된다.

이들은 절대 왕정을 지지하고 절대왕정이 절대적 자연적 재산권을 확립하여 자유주의 경제체제를 만들기를 원하였으며 토지만이 생산적이라는 그들의 이론에 따라 농업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중농학파는 사회변혁의 희망을 튀르고(Turgot, 1727-1781)에 걸고 있었다.




<튀르고>

튀르고(Turgot)는 중농학파의 자유무역과 자유주의 정책에 동조하였으나 중농학파의 이론을 믿지 않았으며 토지를 유일하게 생산적인 요소로 보지도 않았다. 그는 오히려 창의적이고 뛰어난 오스트리아학파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학자이다.

튀르고의 이론은 중농학파와 아주 중요한 점에서 달랐지만 그는 이런 차이점를 드러내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튀르고의 전략은 중농학파의 후원 아래 프랑스 관료사회에서 높은 지위, 재무부장관이 되어 자유주의 개혁을 실현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헌법에 바탕을 둔 공화정을 믿었다. 즉, 왕정이 아니라 재산을 가진 모든 사람들이 동등하게 입법에 참여하는 권리를 가진 입헌 공화정이 자유주의 정책과 재산권의 보호에 가장 적합할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나 왕정을 구태여 뒤엎고자 하지는 않았다.15 친구이자 수학자-철학자였던 콩도르세(Condorcet, 1743-1794)처럼 현재의 왕을 개종시키는 전략을 택하였다.

마침내 튀르고는 1774년 재무부장관이 되고 주변에 자신의 조력자로 콩도르세 등을 모은 다음 자유주의 개혁정책을 실천한다. 그 첫 번째 개혁 실험은 국내외 모든 곡물 무역의 자유를 선언하는 1774년 9월 13일의 칙령이었다.16 그러나 곡물무역의 자유화정책은 관료, 무역제한주의자들, 그리고 가격통제가 빵의 부족을 야기했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하는 일반 대중의 강렬한 저항과 폭동을 초래하였다.

이에 굴하지 않고 그는 이어 6칙령(Six Edicts)을 포고하는 등 자유주의 정책을 계속 추진해 나간다. 6칙령은 국가 도로 건설에 강제노역의 동원을 금지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저항을 만나는데 바로 교량도로부(Department of Bridges and Roads) 장관 트뤼댕(Trudaine)이었다. 그는 튀르고의 친구이자 동료 자유주의 개혁가였으나 장관이 된 후 관료로서의 이해를 그의 신념에 앞세웠다. 교량도로부 장관으로서 강제징역은 도로예산에 얽매이지 않고 도로를 건설할 수 있는 길이었는데 이의 금지는 이제 도로 건설이 예산제약 아래에 있게 되는 것을 의미하였는데, 그는 이에 반대하였다. 강제징역의 금지는 또한 조세부담의 증가를 우려한 상류층의 거센 저항을 받았다. 결국 튀르고를 중심으로 한 “철학의 지배”(reign of philosophy)는 1776년 5월 튀르고가 장관직을 사퇴함으로써 막을 내린다. 튀르고의 개혁 시도 이후에는 프랑스혁명이 발발할 때까지 더 이상의 개혁은 이루어지지 않게 되었다. 그 후 케네가 사회연구에 대한 흥미를 잃게 되면서 중농학파와 자유주의 개혁운동은 급속하게 쇠퇴하고 만다.17




다. 시사점들

로스바드는 이 왕의 개종 전략에는 치명적 결함이 있다고 지적한다. 우선, 그는 자신의 백성의 재산권과 자유를 보호하는 것이 정말 왕의 개인적 이해와 일치하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제기한다. 명백히 단기적으로는, 어쩌면 장기적으로도, 백성으로부터 더 많이 가져오는 것이 왕에게 이득이 되는 것이 아닌가? 그는 결국 절대왕권을 가진 왕의 이타주의에 의존하는 것은 너무나 자유주의 사회변혁의 기초로는 박약하다고 결론을 내린다. 오히려 위로부터의 개혁이 아니라, 밑으로부터의 개혁을 시도하는 더 어려운 길을 택했더라면, 프랑스 혁명을 좀더 자유주의적 경로로 이끌 수 있었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따라서 왕의 개종에 의존하려는 전략은 비록 최소한 장기적으로 대중을 설득하는 어려운 작업을 하지 않아도 되고 왕의 개종만 확보하면 최소한 단기적으로는 개혁을 시도해보는 데까지 성공할지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단기적 개혁시도의 성공이 실질적인 개혁 자체의 성공과 정착으로 이어져 진정한 성공을 이루어내기 어렵다는 것이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왕의 개종 전략이 좌절되는 역사적 경험을 통해 우리는 일반적으로 학자들이 가지고 있는 “소박한” 꿈, 즉, 고위 관료로 발탁되어 자신의 이론을 정책으로 펼쳐본다는 것이 생각처럼 실질적 성공으로까지 이어지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어쩌면 보에티의 전략을 기본으로 삼고 그 전략에 빠져있는 것들을 보충하는 것이 사회변혁을 이루어내는 데 더 현실적인 전략일 수 있다.




(3) 대중을 이끄는 부대장으로서의 지식인: 제임스 밀의 “레닌주의”

가. 제임스 밀

마지막으로 로스바드가 다루고 있는 자유주의 사회변혁의 전략이 제임스 밀(James Mill, 1773-1836)의 “레닌주의”이다. 로스바드에 의하면, 밀은 사회사상에서 가장 저평가되고 있는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스코틀랜드 구두제화공의 아들로 태어나 에딘버러 대학에서 아담 스미스의 수제자 스튜어트(Duglad Stewart)에게서 배웠다. 목사직을 위해 교육받았으나 중년까지 직업을 얻지 못해 궁핍 속에 살았다고 한다. 런던에서 자유기고가로 활동하던 밀은 방대한 책 '인도의 역사'(History of India)를 쓰고 나서야 동인도회사의 중역 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밀은 3가지 핵심적 논제인 공리주의, 민주주의, 그리고 자유주의를 바탕으로 하여 철학, 심리학, 정치학, 역사, 교육 등 인간행동에 관련된 거의 모든 주제에 대해 책, 논문, 신문 기고 등을 썼으며, 동시에 주변의 모든 이들을 의회의 “철학적 급진파”(Philosophic Radicals)로 조직하였다. 그는 항상 제2인자로 남아 있었다. 전면에 맑스주의의 맑스에 해당하는 인물로는 철학에는 벤담, 경제학에는 리카도를 내세웠으며, 자신은 레닌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벤담의 비서로서 벤담이 그의 공리주의의 정치철학적 귀결로 민주주의와 보편 투표권을 채택하도록 한 것은 바로 밀이었다고 한다. 은퇴한 증권브로커였던 리카도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밀은 그의 스승이자 그에게 마셜의 경제학원론이 나오기 이전에 가장 유명한 경제학원론 책이었던 '정치경제학과 과세의 기본원리'(Principles of Political Economy and Taxation, 1817)를 쓰도록 끊임없이 “괴롭히고” 리카도를 의회로 진출하도록 부추겼다고 한다.18

밀은 매우 겸손하지만 유머가 없고 스스로에게 매우 엄격한 캘빈주의자19였는데, 로스바드는 밀이 이인자를 자처한 것 자체가 성격에서 온 것이라기보다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구두수선공 아들로서 취할 수 있는 하나의 전략으로 볼 수 있다는 의견을 제시한다. 아무튼 밀은 10-20명의 소규모이지만 매우 강력한 집단인 철학적 급진파를 이끄는 부대장 역할을 담당하였는데, 이들은 대부분 밀 자신에 의해 (밀의 방식으로 본) 자유주의자로 개종된 경우였다. 로스바드에 따르면, 심지어 아들에 대한 혹독한 교육은 흔히 알려져 있듯이 자신의 교육이론을 실험한 것이라기보다는 차세대 지도자로 키우려는 의도였다는 것이다. 이처럼 카리스마를 지녔고, 유머가 없으며, 설교적이었던 밀은 이런 성격의 장단점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20

밀은 자유주의 계급이론과 이 이론에 따라 민주주의에 대한 열정을 지니고 있었다. 밀의 이론에 의하면,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지배계급(ruling class)은 국가권력을 획득을 지닌 계급을 말하며, 피지배 계급은 지배자에 의해 조세를 징수당하고, 규제를 받고, 통제를 받는 계급을 말한다. 자유시장과 자유사회 안에서는 모두가 조화롭지만, 국가권력을 누가 통제하며 누가 통제받느냐의 문제에서는 갈등이 벌어진다. 소수의 지배자들은 약탈하는 자이며 약탈당하는 다수가 피지배자이다. 정치는 이 두 계급간의 투쟁이다. “이 약탈을, 이 약탈을 할 수 있게 하는 힘을 어떻게 배제할 것인가?” 밀은 이 문제를 정부의 거대문제(the great problem of government)로 보고 이에 대한 해답으로 국민들이 감시인을 임명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면 “그 감시인을 누가 감시할 것인가?”라는 정치학의 고전적 문제에 대해 그는 “국민 대중 자신들”이라고 보았다. 그렇다면 “국민들이 어떻게 스스로 감시자가 될 수 있는가?” 그의 대답은 “모든 국민이 감시를 할 대표자를 자주 비밀 선거를 통해 선발함으로써” 감시자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정기적인 보통선거가 소수의 약탈을 종식시킬 것으로 기대하였고, 이를 무엇보다 먼저 쟁취해야할 정치적 이상으로 삼았다.21

밀은 이 의회의 대표자들이 귀족의 지배를 대신한다고 할 때 이들이 자유주의 정책을 펼칠지에 대해 어떻게 확신할 수 있었을까? 밀의 대답은 비교적 순진하다. 국민들의 공통적 이해(common interest)는 특권을 배제하는 데 있기 때문에 이렇게 뽑힌 이들은 귀족들과는 다를 것이라고 보았다.




나. 지식인의 역할(Role of Laissez-faire Intellectuals)과 전략

밀은 지식인의 역할을 일반 대중이 “잘못된 의식”(false consciousness), 즉 자신들의 이익이 어디에 있는지에 대해 무지한 것을 깨뜨리는 데 있다고 보았다. 대중들은 자유주의가 자신들에게 이득이 됨에도 불구하고 이를 지지하지 않고 소수의 약탈적 지배를 진정으로 지지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는데 지식인의 역할은 바로 대중을 교육하고, 조직하여 그들의 의식이 정확하게 되도록 만드는 데 있다고 보았다.

이에 따라 밀은 최종적인 목표를 향한 중간경유지로 선거권의 확대를 전략으로 삼았으며 이에 따라 중산층까지 투표권을 확대하는 내용의 「1832년의 개혁안」(the Reform Bill of 1832)의 통과를 위해 주력한다. 밀에게는 자유주의 정책보다 민주주의의 확장이 더 중요하였는데 민주주의가 확립되면, 거의 반자동적으로 자유주의정책을 수반할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이끈 철학적 급진파들은 「개혁안」의 통과에 전념하기 위해 반곡물법연맹(the Anti-Corn Law League)과의 동맹을 거부한다. 역설적이게도 이런 거부 이후 이 운동은 급속하게 쇠락하고 만다.

밀은 「개혁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휘그당 정부에, 이 법안이 통과되지 않으면, 폭동이 일어날 것이라는 공포를 심어주는 전략을 채택하고, 실제로 그런 일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주요 언론들에 이런 심증을 주는 사건들이 있는 것처럼 보도하도록 뒤에서 조정한다. 뢰벅(Roebuck)의 회고에 의하면, “대중들에게는 보이지 않았지만, 밀은 인형 쇼에서 인형 줄을 당겼다 죄었다하는 인형술사(puppet master)였다.”

민주주의 자체가 자유주의 정책의 보장자가 아니라는 점은 이제 너무나 잘 드러난 사실이고 이에 따라 이에 대한 믿음은 급속하게 시들었다. 더구나 자유 무역주의 운동에 동승하지 못함으로써, 철학적 급진파들은 곧 정치 무대에서 쇠락하는 운명을 맞게 되었다.




다. 시사점

자유주의의 전략으로서 밀의 “레닌주의”는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하는가? 로스바드는 우선 밀의 전략이 앞에서 살펴본 다른 전략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장 희망을 걸만한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그는 다음과 같은 점들이 유보되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우선 밀이 보이고 있는 과도한 민주주의에 대한 낙관주의의 오류이다. 즉, 밀의 전략은 올바른 이론의 바탕 위에 서 있지 못했던 것이다. 민주주의가 자유주의와 일으킬 수 있는 갈등에 대해 충분히 깨닫지 못했다는 문제가 있었다. 두 번째로 밀의 “레닌주의”는 자유주의 원칙이 사회에 조금이라도 더 확립되도록 만들기 위해 자유주의의 원칙 자체를 조금이라도 어겨도 되는지 심각하게 생각해보도록 한다.22 아울러 자유주의 (정치)지도자는 반곡물법동맹처럼 중요한 세력과 협력적 관계를 맺고 지나친 갈등은 피함으로써 그 추진력을 상실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23







3. 한국 자유주의 지식인의 사회변화에 대한 역할

로스바드가 잘 지적하고 있듯이, 자유주의 운동은 비록 자유주의자들이 믿고 있듯이 그것이 진리라는 점에서 중요한 힘을 얻고 있다고 하더라도, 맑시즘이나 사회주의 운동, 혹은 그 변형에 비해 이를 사회변혁 운동으로 삼을 때 나름대로 어려운 점들을 안고 있다. 우선 자유주의자들은 이들에 비해 전략에 대해 별로 투자를 하지 않고 있다. 이에 더해 자유주의는 마르크스주의의 노동자, 혹은 모택동의 농민 등과 같이 즉각적으로 확인 가능한 특별히 선호하는 사회변혁의 주도계층을 가지고 있지 않다. 자유주의는 반직관적이라는 지적도 있다. 국가의 권력의 문제와도 부딪칠 수 있다.

이런 문제들을 어떻게 극복할 것이며, 자유주의 지식인, 특히 하이에크 소사이어티는 어떻게 대응해나가야 하는가? 우선 첫 번째로 소위 전통적 의미에서의 “순진한” 교육주의의 차원에서도 반성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최근 경제학계에서 정책에 대해 나오는 조언이나 발언은 자유주의에 기초한 정책보다는 “사회안전망의 강화” 등과 같은 목소리가 먼저 들리고 더 많이 들리고 있으며 더 많이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이는 아직 자유주의 학자들이 학계에서 리카도나 벤담이 차지하던 정도의 영향력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자유주의를 본격적으로 다루는 전문저널이 아직 확립되지 않아서 자유주의에 대한 학자들 사이의 치열한 내부논쟁을 이끌지 못하고 있다. 보에티에 대해 설명하면서 언급하였지만, 우리나라의 자유주의연구에 있어 장기간에 걸친 영향력과 단기적 관심의 집중을 위해 자유주의를 다룸에 있어 추상성과 구체적 적용에 있어 적절한 균형을 취하고 있는지도 점검해 볼 내용이다.

먼저 이론의 측면에서 핵심적 개념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 재정립하는 방법은 되도록이면 학계의 관심을 유발할 수 있도록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물음에 대해 반대편 학자들에 대항해서뿐 아니라 내부 학자들 사이에서 치열하게 논쟁하여야 한다. “시장실패와 정부실패를 모두 인정하면서 경우에 따라 정부가 행동하고 또 경우에 따라 시장에 맡겨야하는가?” “국가의 역할은 어디까지인가?” “자유주의자는 민주주의를 어디까지 받아들일 것인가?” “사회안전망이라는 개념을 수용할 것인가?” “수용한다면 어디까지 수용할 것인가?”

이런 노력과 병행하여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를 “자유주의자”라고 부르기 때문에 이를 정확하게 차별화하여야 한다. 자유주의자들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확실하게 불식시켜야한다. 예를 들자면, 자유주의자는 기득권 옹호자, 부패의 옹호자, 사회의 변화를 거부하는 자와 같은 잘못된 도식을 확실하게 불식시킬 필요가 있다. 이를 불식시키는 방법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단순히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거나 혹은 그 반대가 사실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아즈(Boaz)의 말처럼 자유주의가 “최첨단”(leading-edge) 이념이란 인식을 심어주는 것도 더 적극적인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24

이와 동시에 하이에크 소사이어티도 전략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좌파 지식인들이 전략에 더 투자하고 있음은 거의 분명해 보인다.25 사회변혁의 실질적 영향력을 확보한다는 차원에서 권력획득 혹은 사회변혁 자체가 목적인 정당이나 기타 시민단체들과는 어떤 관계가 바람직한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아야 한다.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일반대중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게 함으로써 정치적 대세를 얻으면서도 자유주의를 고수하는 것은 어디까지 가능하며, 무엇을 어떤 방식으로 주장하는 것이 바람직할까? 이런 전략을 만들어내기 위해 우선 이런 주장에 반하는 주장을 정확하게 집어내는 것이 필요하다. 싸와야할 “지배적 도그마”가 무엇이며 어떤 순서로 잡아 싸우는 것이 좋은지 연구해야할 것이다.







4. 맺는 말

이 글은 자유주의자들도 전략에 대해 고민해보아야 한다는 취지의 로스바드의 글이 중요하다고 판단하여 이를 토론자료로 이를 소개하려는 것이 주목적이었으며, 자유주의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전략과 여기에서 지식인이 담당할 바람직한 역할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고 쓴 것은 아니다.

로스바드가 순진한 교육주의라고 이름붙인 것에 머물지 않고 실제의 사회변혁의 주역이 되기 위해 자유주의자들이 할 일은 참으로 많고도 어려운 것 같다.

진리를 밝히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지식인의 가장 중요하고도 기본적인 책무이겠지만, 사회과학자들에게는, 특히 자신의 연구가 세상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확신하고 싶은 이들에게는 튀르고의 경우가 좋은 반면교사가 될 것이다. 튀르고는 중농학파의 오류도 꿰뚫어본 뛰어난 경제학자였을 뿐 아니라 개혁에 대한 열정도 누구 못지않았지만, 결과적으로 자유주의 개혁을 성공해내지 못했고, 그가 이에 성공했더라면 프랑스혁명이 좀 더 자유주의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전개될 수 있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비록 자유주의 개혁이 바른 방향이라고 하더라도, 전략에 대해 고민하지 않은 채 자유주의 개혁을 시도하게 되면, 자칫 실패로 끝날 수 있고, 이에 자유주의자 혼자만의 실패가 아니라 많은 다른 이들에게도 고통을 주는 실패가 될 수 있다.

다른 이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유주의자 자신들을 위해서도 전략에 대해 고민하여 실제로 현실의 변화를 이루는 데 성공할 필요가 있다. 하이에크가 만년에 활발한 집필을 할 수 있었던 원동력 가운데 하나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등 직접 자신의 예언이 적중하였음을 보았기 때문이며, 아울러 그에게 신중상주의적 거시경제조정정책의 실패를 예견한 공로로 노벨경제학상이 주어지는 등 현실의 변화가 그를 고무시켰기 때문이었다. 자유주의자가 현실에 대한 탄식을 멈추고 왕성하게 활동하게 되는 것은 현실세계의 변화를 실제로 목격하고 이를 기대할 수 있을 때이다. 자유주의자들도 시간선호의 지배를 받으며, 따라서 지연된 희망은 자유주의자들도 멍들게 할 것이므로 전략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도 자유주의 지식인들도 전략의 문제에 대해 좀더 많은 연구와 고민이 필요하며 그런 점에서 이 글이 이런 고민의 필요성을 환기시키고 이 분야의 전문가들인 자유주의 정치학자들, 지식사회학자들로부터의 논의를 점화시키기를 기대해 본다.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요즘
의견달기 닉네임 : 비밀번호 :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5 [토론회] 앵거스 디턴『위대한 탈출』의 의의와 한국경제에 주는 시..  시장경제제도연구소 2015-11-04 712
4 오스트리아학파의 경기변동이론과 통화정책적 시사점  시장경제제도연구소 2013-03-20 1686
3 사회변화를 모색하는 자유주의 지식인의 전략  시장경제제도연구소 2013-03-20 1315
2 경제민주화 그리고 1원1표, 1인1표, 1주1표  시장경제제도연구소 2013-03-19 1226
1 편법,무원칙,무질서를 넘어 '선진 대한민국으로 향하는 길'  시장경제제도연구소 2013-02-15 871
[1]